2013. 1. Day2
생애 첫 자취방이 생기다
어제 저녁 해가 지고 한참지나서야 버스를 타고 hauz kaus로 올 수 있었다. 이곳은 사리타와 친구들이 살고있는 곳으로 IIT Delhi 옆에 있는 공무원 고시촌+대학생 자취촌 정도의 느낌이었다. 밤엔 사람들이 좁은 골목에 나와 호기심가득한 눈빛을 보내는바람에 조금 무서웠지만, 날이 밝고나서 보니 이곳이 인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평온한 동네였다.
여튼, 결전의 날(?)이 밝았다. 사리타는 30일 저녁에 다른 도시에서 있을 연구원 면접을 위해 하루간 떠나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수요일엔 나 혼자(!) 병원에 가게되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병원가는 길이 무척 간단해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507번 버스를 타고 네다섯 정류장쯤 지났을까, 여러 동으로 이루어진 병원 건물과 AIIMS 지하철역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규모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병원 정문을 지나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엔 'All India Institue of Medical Science'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일을 저질렀구나' 실감이 되었다.
인터넷에서 AIIMS라는 이름을 찾아내던 순간엔, 내 두발로 이곳에 서는 날이 올거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었다.
사실 어제 저녁부터 꽤나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영어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사리타가 내게 무언가를 말하면, 정신이 살짝 혼미해지면서 각각의 단어들이 공중분해되는 느낌이다. 오늘은 특히나 처리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는데 계속 이상태가 지속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지겠구나 싶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다시한번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하고 다니는 것이 여간 진빠지는것이 아니여서, 갈수록 스스로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체력적으로 피곤하기 때문이라고 느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100% 심리적 원인에 의한 현상이었다. 우습게도 심카드가 개통된 후 이 증상은 빠른속도로 사라졌기 때문. 하고픈 말은 머리에 꽉꽉 차있는데, 말로 꺼내놓는 비율은 제한되어 있어 일어난, 이른바 사고포화현상이었을 것이다. 이젠 괜찮아졌지만, 그당시를 생각하면 내가 너무 안쓰럽게느껴진다ㅜㅜㅋㅋㅋ
가장 먼저, registar사무실로 가 Doctor Sharma를 찾아갔다. 내 상상과는 다르게 그는 동글동글하고 친절한 인상의 할아버지였다. 감동적이게도 그는 나의 이름을 이미 알고있었고, 외국인 학생이 인도 병원에서 트레이닝을 받으려면 외교통상부에 허가를 받아야 하기에 문서를 이미 보냈다고 한다. 사무실 책상에 수북히 쌓인 선택실습 지원서(심지어 유럽사람도 있었다)를 보며 내가 이곳을 너무 과소평가했구나 싶었다. 허가를 받기 위해, 우리는 오늘내일중으로 담당 부처를 방문해야한다고 했다. 원래는 3-4일정도 걸리는 일인데, 사람들은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이를 단축시킬 수 없는지 부탁하는 등 나를 위해 애써주었다. 처음보는 외국인에 대한 그들의 호의가 참 감사했다.
오늘 하루동안 사리타의 연구실과 그 주변에서 꽤 많은 사람들을 소개받았다. 다들 인도전역에서 모인 수재들이겠지. 똑똑하게 생긴사람들이 많더라. 병원 복도를 걷다 우연히 마주친다면, 그들의 이름이나 얼굴을 기억하기 힘들 것 같아 걱정했지만, it's okay 내일 다시 물어봐야지뭐.ㅎㅎ
이곳저곳을 바쁘게 움직인 결과, 중요한 사항(허가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지)은 내일 결정되고, 그때부터 나는 실습을 시작할 수 있으므로 우선 우다이뿌르행 열차는 취소하기로 했다. 2월14일 바라나시에 가기 전까지 아마 실습을 돌게 될 것 같다. 원래는 내분비내과와 소아과 두군데를 보려고 했지만 복잡한 사정때문에 그냥 한 과만 선택하는게 나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리타의 동료가 사준 점심(치킨'뼈' 커리와 짜파티ㅎㅎ)과 식후 짜이 한잔 후에, 연구실과 사무실을 몇번 왔다갔다했을 뿐인데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체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꽤 많은 성과를 얻은 날이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 유심카드 개통, 실습에 관련된 것까지.. 어째서 나는 실습 지원을 거부당하는 생각만 했던 것일까? 이곳 사람들이 이토록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미처 기억하지 못한 탓일까. 그동안의 걱정이 무안할 정도로, 모든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
일을 마무리하는 사리타를 기다리는 동안, Dileep Kumar 라는 친구와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부족한 내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말이 잘 통하는 느낌이어서 기뻤다. 한국에 언제 초대할거냐는 이야기부터 그의 이름이 유명 배우의 이름과 같다는 것, 강남스타일이야기, 고개를 양옆으로 흔드는 인도식 'yes' 표현법에 대한 오해 등등... 그리고 그동안 궁금했던 힌디어표현을 묻자 그는 노트에 꼼꼼히 적어주었다. 딜립은 유전학 분야에서 박사과정을 이수중인 친구였는데 박사과정이 끝나면 미국으로 유학을 가 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오늘 하루동안 그들을 보며 느낀것은 나와 고작 2살차이정도 나는 그들이지만 한국의 대학생. 멀리 갈필요도 없이 내 모습과 비교해 너무나 성숙한 자세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무척 독립적이고, 강해보였다. 결혼하기 전까지도 집에 손을 벌리는 우리 모습이 떠올라 괜히 부끄러웠다.
집에 오는길 사리타의 드라이 세탁물을 찾기 위해 시장에 들렀다. 관광객이라고는 한명도 없는 그야말로 로컬 시장이었다. 사리타가 세탁물 교환증을 잃어버린 관계로, 우리는 30분정도 시간을 떄우게 되었다. 티베트인?중국인?으로 보이는 소년들이 팔던 모모(만두와 비슷한 음식)를 인도식 소스와 잔뜩 버무려 먹기도 하고, 필요한 화장품을 사거나 눈썹을 다듬어주는 미용실(!!)에서 사리타의 눈썹을 재탄생시키는 ㅋㅋ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그곳에서는 가위를 거의 쓰지않고 흰 실을 이용해 눈썹과 주위 잔털을 제거하고 있었다. 2주후 내눈썹이 자라면, 나도 이곳에서 눈썹다듬기를 받기로 약속하고 시장을 빠져나왔다. 크크 은근히 기대가 되는구낭
드디어 숙소 도착! 사리타의 룸메이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오빠의 전화. 1월 29일은 우리의 600일. 먼저 챙기지 못한것이 참 미안했지만 주위 상황이 워낙 바빠 제대로 표현하질 못한 것 같다. 저녁부터 갑자기 인터넷이 되지 않아 틱톡을 할 수 없었지만, 내일 문제를 해결하고나면 장문의 편지를 써봐야겠다. :)
계속해서 음식을 거절하는 것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지만, 나의 목표를 위해! 최소한의 식사만 한 뒤 샤워를 했다. 하루종일 들이마신 먼지를 생각하면 아무리 춥고 귀찮더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후 홍콩에서 사온 신기한 마스크팩(귀에 거는 부분, 목을 감싸는 부분도 있었다. 일명 3D 마스크팩!)을 하고 친구들을 깜짝놀래켜주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어둬야한다며 카메라를 꺼냈지만 나는 옆방으로 줄행랑을 쳤다. 나 시집은 가야지얘들아....ㅋㅋㅋ 다행히 마스크팩이 여러개라 하나씩 나눠줄 수 있었고 함께 마스크팩을 붙이고서 유령컨셉의 사진을 찍어 박장대소하기도 했다. 웃음소리로 가득찼던 그 순간이 따뜻하고, 행복했다. 언어와 사고방식이 다른 우리지만, 또래라서 느낄 수 있는 연대감과 언어 그 이상의 무언가가 우리를 연결시켜주고 있었다.
그렇게 길고도 짧았던 인도에서의 둘째날이 저물어 갔다.
하루하루, 이곳에서 내 인생에 다시 없을 경험들을 쌓아나가는 중이다. 마치 한순간에 벼락부자가 된 느낌.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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