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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아침에는 가족끼리 둘러앉아 엄마가 만든 명절 음식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근처 신사에 참배를 다녀오니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졌다. 동생 부부와 조카가 차로 돌아가자, 엄마는 설 특집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고, 술 취한 아버지는 그 옆에서 코를 골았다. 미쓰요는 시간이 남아돌아 자전거를 타고 연중무휴 쇼핑센터로 향했다. ..(중략)
서점을 나와 CD숍으로 들어갔다. (중략)... CD숍 창으로 밖이 내다보였다. 조금 전 자기가 세워둔 자전거가 보였고, 누가 버렸는지 자전거 바구니에 빈 깡통이 들어 있었다. 순간, 눈앞이 흐릿해졌다. 자기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은 바로 그때였다. 미쓰요는 급히 가게를 빠져 나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자기가 왜 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자전거 바구니에 빈 깡통이 들어 있을 뿐인데...
갖고 싶은 책도 CD도 없었다. 새해가 밝았는데도 가고 싶은 곳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까닭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소리까지 내며 울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문득, 철저히 나 홀로임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이렇게 무너지고 만다.
이 장면을 마주했을 때, 왜 그리 마음이 쓰리던지... 미쓰요의 눈물 방울방울이 내 심장을 태워 녹이는 기분이었다.
새해 첫 아침이라는 것만 빼면 아주 특별한 상황도, 비극적 상황도 아니었다. 당장 나에게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상황이 미쓰요에게 일어난 것 뿐이었다. 그런데, 미쓰요는 울고 있다. 서럽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것이다.
'청년의사' 독후감 공모전에 응모해볼까 하고 읽기 시작한 일본 소설.
원래 나는 현대 일본 소설에 대해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어렵거니와 대체적으로 내용과 구성이 너무 가볍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자연히, 그 분야의 책을 접해볼 기회도 없었던 나는 일본 소설 특유의 분위기에 적응하느라 처음 50여 페이지를 꽤 힘겹게 넘겨야 했다. 대신 어느 정도 소설에 몰입하고 나니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다.
여러사람의 관점, 진술을 통해 입체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 구성이 참신하게 다가왔다.
시시껄렁한 연애소설 일색인줄만 알았던 일본소설도 이런면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그동안 편협했던 독서의 틀을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사회는 윤택해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람을 그리워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만남사이트, 업소등은 그 그리움의 일그러진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주인공들은 방황한다. 웃고, 울고, 분노한다. 거대한 일렁임속에서 곧게 서기에, 그들은 너무나 작았다.
소설을 읽으며 느꼈던 전반적인 생각은, 서럽도록 외롭고 차가운 세상이 악인을 만든 것이지 그 자체가 惡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그러나 그 확신을 실천할 용기까지는 나지 않음을 깨닫자 조금 우울해졌다.
유이치 - "우리끼리 하는 얘긴데 난 어머니 만나면 돈 뜯어내."
미호 - "흐음.."
유이치 - "원치 않는 돈을 뜯어내는 것도 괴로워."
미호 - "그럼 안 뜯어내면 되잖아."
유이치 - "..... 그렇지만 양쪽 다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
미호 - "흐음.."
유이치 - "원치 않는 돈을 뜯어내는 것도 괴로워."
미호 - "그럼 안 뜯어내면 되잖아."
유이치 - "..... 그렇지만 양쪽 다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
양쪽 다 피해자가 되고 싶어한다...
읽는 순간 소름이 끼쳤던 구절이었다. 유이치는 무서울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말을 하곤 했다.
세상에서 하는 말이 맞는 거죠? 그 사람은 악인이었던 거죠? 그런 악인을, 저 혼자 들떠서 좋아했던 것 뿐이죠.
네? 그런거죠?
절규에 가까운 미쓰요의 마지막 질문에 할말이 없어진 나는, 그저 조용히 책장을 덮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누구나 외롭다.
그러나 딸을 잃은 슬픔을 딛고 '이발소 이시바시'의 회전등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품고 일어나야 한다. 그 시도 또한 결국은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일어서려는 도전을 했다는 것, 그 자체로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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