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셉션에서 처음 보고 반해버렸던, 조셉고든레빗의 웃는 눈이 좋아서 보게 된 영화.
워낙 많이 회자되던 유명한 로맨틱영화이기도 해서 나름 기대를 가지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영화는 한시간 반의 러닝타임동안 관객에게 하나의 질문을 끈질기게 던진다.
'사랑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더 짠한 둘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든 생각은 '그게 정말로 중요할까?'였다.
영화 내내 여주인공 썸머 보다는 남자주인공 톰에게 훨씬 더 감정이입되어 몇 번씩이나 마음이 아릿했다. 물론 여주인공이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연인, 남자친구 같은 이름 붙이기 싫어하는 모습에선 예전의 내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얄밉지만 이해는 갔다.
마냥좋기만 하던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틈, 조금씩 여자의 마음이 식어간다는 사소한 증거들. 그걸 바라보는 톰의 멍한 표정. 내가 사랑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모든게 바보같아 보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를 반대방향으로 돌려보려 낑낑대는, 누군가는 한심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모습 안에 든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느껴져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 영화에 대한 누군가의 리뷰를 읽었다. 어떻게 봐도 도저히 논리적일 수 없는, 우스운 일이 바로 사랑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랑을 원하고, 끊임없이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식의 이야기었다. 요즘의 사랑은 '원래의 그 사랑'과 조금씩 다른 의미를 품게 되는 것 같아 가슴아프지만. 본질적으론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말이었다.
썸머의 몸짓, 썸머의 무릎과 웃을 때 드러나는 이, 반짝거리는 눈이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수 없다는 남자의 대사가 있었다. 그리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똑같은 이유로 썸머가 견딜 수 없이 밉다는 이야기를 했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란건 '지금은' 뜨거운 마음을 빛나게 해주는 장식에 불과하다. 축제가 끝나고, 계절이 바뀌며 눈과 비가 지나고 나면 장식은 흉물스런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 특성은 변질될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중요한 것은 축제가 끝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이겠지. 물론 그게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힘들다는 핑계를 대기엔 우리 삶은 야속하리만치 짧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알랭드 보통의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라는 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을 하는 우리들의 모습, 그러다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작가가 유명하다는 사실과 그 모든 상황에서 겪는 심리의 변화를 촘촘하게, 리얼하게 묘사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리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책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단 한가지. 사랑에 있어 마음이 변하는 건 나쁜일, 못된일 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내가 (작가의 탁월한 글솜씨 때문인지, 아님 원래 사랑이 그렇게 생겨먹어서인지는 몰라도) 그 책 이후로 사람의 마음 변화에 대해 어떤 도덕적 꼬리표를 붙이지 않는게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당하는 입장이라면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을테지만 (상대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놈 같겠지만) 마음 편한 객관적 입장에서 보자면. 그게 옳은 것이라 믿는다.
썸머와의 500일이 끝나고(정확히 말하면 썸머와 만난 날이 아닌, 그녀를 정리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의 마음에 들어온 여자의 이름은 재미있게도 'autumn'이었다. 알랭드보통의 책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는데, 실연에 아파하던 주인공이 비행기에서 만난 여자에게 반하고,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2년 전이었다.) 내 속마음은 '결국 남자들이란...'이라든가 '사랑이 원래 저런거지. 내가 뭐그리 대단한걸 기대했을까' 같은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생각들 뿐이었지만, 이제는 잔잔한 미소정도는 머금으며 그 장면을 바라볼 수 있었다. 2년반 동안의 시간이, 나라는 사람을 많이 변하게 했구나. 다시한번 생각했다. 사람과 관계에 대해 관대함과 신뢰를 가질만한 용기가 생겼고, 더 여유를 갖고 상대를 대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변화에 대해 조금은 차분해질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 운명, 우연 어느쪽을 믿든, 우리는 사랑을 필요로 하고 나름의 방식대로 그 필요를 채워나간다. 사랑은 무조건 영원할거라 믿던 시절이 있었고, 소설 속 사랑이 현실 어디서나 일어날 줄로만 알았다. 때로는 상대가 마음이 변했을 때, 내가 받을 상처가 두려워 마음을 숨기고 살기도 했고, 그러다 정말 그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망연해졌던 경험도 있었다. 여러해 동안의 이야기를 지나 지금은 그때완 많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곧 운명을 믿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운명을 믿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인연을 믿는다. 무슨 차이인가 하면, 그 상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되었다는 말이다.
'그를 오늘까지만 볼 것처럼 사랑하자.'
사랑할 때 항상 마음에 새기는 말이다. 괜시리 짜증이 나거나 관계의 익숙함에 힘이 들 때 내게 많은 도움이 되는 이야기이다. 그 사람이 내게 다가와 함께하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말이라고 해야할까.
영화 한편에 담긴 생각이 주절주절. 많기도 하다. 어쨌거나 하고싶었던 말은 이것.
'그러니 축제는 시작되어야 하고, 시작된 이상 계속되어야한다. 축제가 끝날 것을 두려워하며 축제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다.'
'사람들이여, 모두 사랑을 하자! 인생을 즐기자!' 같은 1930년대스러운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이야기는 나에게 참 부자연스럽고 거북하게 느껴진다. 쌩뚱맞지만, 나는 그래서 여성잡지가 싫다)
여러분은 영화 '라쇼몽'을 본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한날 한시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여러명의 등장인물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어떤 대상을 향한 관점이란 얼마나 가볍고 유동적인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라쇼몽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언젠가 내가 '500일의 썸머'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어떤 리뷰를 쓰게 될지 상상하기 힘들어서.. 분명 2013년을 살던 내모습과 같지는 않겠지만, 사랑에 대한 긍정만큼은 잃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과 함께, 영화에 대한 생각을 마무리해본다.
월요일의, 소소하지만 모처럼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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